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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신 선생님은 자애로우면서도 엄격하셨으며 늘 앞서나가시는 분이셨습니다. -제자 이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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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신 선생 80周忌, 이 시대의 '상록수'들 나타났으면
문화예술과 2015/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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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1/22/2015012204389.html

[아침 편지] 최용신 선생 80周忌, 이 시대의 '상록수'들 나타났으면


입력 : 2015.01.23 03:00
김수철 안산시 상록구·최용신 블로그 운영자


오늘은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의 실존 인물인 일제강점기 농촌 계몽운동의 선구자 최용신 선생〈사진〉이 짧은 생을 겨레에 바친 1935년 1월 23일로부터 80년이 되는 날이다. 최용신 선생이 활동한 지역인 안산시 상록구 주민이자 2003년부터 최 선생 관련 블로그를 운영하며 선생을 선양하는 사람으로 선생의 지난날을 반추해 교훈을 얻고자 한다.

1920년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일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조선의 농촌 진흥을 위한 정책을 폈다. 만주를 침략하고 중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군량미로 사용할 쌀 등 농산물의 증산과 동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민족 지도자들은 일제의 의도를 간파하고 인구의 80%에 이르는 농민을 깨우치고 실력을 배양해 일제에 항거하자는 대대적인 사회운동을 벌였다. 조선일보는 1929년부터 방학 중 귀향하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문자 보급운동을 벌이며 '한글 원본' 등 교재를 100만부 이상 보급했다. 동아일보도 같은 성격의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했다. 운동은 문맹률이 90%에 달했던 농촌의 아동과 부녀자의 문맹 타파와 의식 계몽에 집중되었다.

그즈음 최용신 선생이 원산의 명문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협성여자신학교(현 감신대)에 입학했다. 그는 교육받은 신여성으로서 가난하고 무지한 농촌에 몸바치기로 결심했다. 1928년 4월 1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선생의 기고문 '교문에서 농촌에'를 보면 여성 일꾼을 요구하는 농촌으로 달려가자는 선생의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최용신 선생.
 
 
선생은 1931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의 농촌사업 교사로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현재 안산시 상록구) 마을에 파견되었다. 처음에는 주민들의 냉소적 태도와 비협조 속에 마음고생이 심했으나 열정과 열심으로 그들을 대하자 점차 주민들이 선생을 존경하고 협력했다. 그 결과 정식 학원을 설립하고 강습소 건물을 짓는 등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민족의식을 강조하고 독립정신을 불어넣는 선생의 교육에 날로 인원이 늘어나자 일제의 감시와 통제가 더욱 심해졌다. 이때 선생이 내세운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구호는 소설 '상록수'에도 그대로 묘사되었다. 이 구호는 당시 조선일보가 문자 보급운동을 위해 간행한 한글 원본 교재 표지에 있는 글귀로서 선생이 한글 원본을 사용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선생은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였으나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해 과로와 영양실조가 더해져 결국 교단에서 쓰러졌다. 만 25년6개월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광복 70년과 최용신 선생 80주기를 맞아 식민 지배를 받던 암흑기의 청년들이 농촌에 뛰어들어 열정을 바친 역사를 되돌아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한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이 시대의 상록수들도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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