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신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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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신 선생님은 자애로우면서도 엄격하셨으며 늘 앞서나가시는 분이셨습니다. -제자 이덕선

최용신

최용신 소개

최용신선생의 묘를 찾은 샘골마을 사람들

유 언(1935.)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샘골[천곡;泉谷]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하여 주십시오.
김군과 약혼한 후 십년 되는 금년 사월부터 민족을 위하여 사업을 같이 하기로 하였는데
살아나지 못하고 죽으면 어찌하나.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가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어머님을 두고가매 몹시 죄송하다.
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마라.
유골을 샘골강습소 부근에 묻어주오.

유언(채록 안홍팔, 글씨 전재풍)

그녀는 생을 마감하는 직전까지 샘골마을이 한국사회의 ‘이상적’인 농촌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하였다. 지속적인 샘골강습소 운영에 대한 부탁은 농촌계몽운동 불씨를 더욱 되살리는 의도였다.

“어머님을 두고가매 몹시 죄송하다.”는 못난 자식으로서 회한에 가까운 고백이다. 우리가 공감하는 최용신의 참모습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남을 위한 삶의 위대함은 그녀가 우리에게 일깨우려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사회장(1935. 1. 23.)

조선중앙일보의 최용신 기사 (1935년 1월 27일자)

최용신 사망은 마을 주민에게 커다란 충격이자 슬픔을 안겨주었다. 주민들은 시신이 안치된 수원도립병원에 모두 달려가는 한편 ‘사회장’을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청년들은 시신운반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등 그녀의 희생적인 활동에 최소한 예의를 다하였다.

장례식은 비통함 속에서 치러졌고 샘골강습소 학생들은 상주로서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묘지는 강습소 뒤편 양지바른 언덕(일리공동묘지)에 잡았다.

상록수(1935. 9. 10)

심훈(沈薰, 본명 심대섭)이 지은 장편소설이다. 동아일보사는 창간 15주년을 맞은 장편소설 공모전을 실시하였다. 심훈은 각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는 농촌계몽운동을 모델로 삼아 이를 저술하였다. 이 작품은 1935년 9월 10일부터 1936년 2월 15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주인공은 고등농업학교 학생인 박동혁(朴東赫)과 여자신학교 학생인 채영신(蔡永信)이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학업을 중단한 채 ‘농촌을 살리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간다. 동혁은 고향은 한곡리, 영신은 기독교청년회연합회 농촌지도사로 경기도 청석골로 내려가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영신은 과로로 학원 낙성식장에서 맹장염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동혁은 악덕지주 농간에 의하여 구속되는 수난을 겪었다.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한 영신은 서울로 올라온 후 기독교청년회연합회 주선으로 요코하마 유학을 단행하였다. 출감한 동혁은 영신이 죽은 줄로만 알고 두 사람 몫까지 실천할 것을 다짐하기에 이르렀다. 세속적인 성공을 포기한 농촌계몽운동가의 희생적 봉사와 추악한 이기주의에 매몰된 비인간적인 대비를 통하여 참된 삶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광수(李光洙) 『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농촌계몽소설이다. 주인공 채영신은 바로 ‘최용신’이다.

김교신 일기(1939. 2. 28. 성서조선)

샘골강습소 5회 졸업생 (1935년 이후)

인쇄소에 들르고 오전 열시차로 수원행. 고농 K군의 안내로 샘골의 고 최용신양의 사적을 심방 하고자 함이다. 오후 1시에 샘골에 도착.

언덕 위에 덩그런 학원은 고 최양이 창자가 꼬여지도록 애써 지은 건물이라 함에 널 한쪽, 흙 한줌도 무슨 신성한 물건 같아 보인다.

형의 희생된 자리에 그 동생이 수업하고 서있는 자태는 눈물겨움이 없이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학원을 바라볼 수 있는 언덕 위에 고 최양의 묘소와 비석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상록수」의 기사와 사실과는 매우 차이가 있음을 알다.

당시의 광경을 목도한 노인 한 분이 고 최양의 사적을 말하려하매 감탄과 눈물이 조리를 혼란케 하는 양을 보면, 최양의 감화가 얼마나 심대하였던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수년 지난 옛날이야기건만 듣는 자로 하여금 어제까지도 최양이 그 고개를 오르내렸고, 그 학원에서 종쳤던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참으로 산 자는 단 하루를 살았어도 영생한 것이다. 동생인 최용경 선생께서 그 형님의 사실편편(事實片片)을 얻어듣고, 불원에 상경하리라는 그의 오빠와 회담 할 수 있기를 부탁하고 사퇴(辭退).

이 학원도 인가문제로 한 달 후에는 폐쇄하게 되리라 하니 냉심(冷心) 뿐이랴!

김교신 일기(1940. 1. 24. 성서조선)

최용신양의 소전과 「聖朝」지 다 잘 받아 보았습니다. 소전은 감격에 사무쳐 밤이 깊어 가는 것도 모르고 하룻밤에 다 읽어 버렸습니다. 그같이 아름다운 신앙에서 저같이 고귀한 일생을 보낸 여성이 일찍 우리 땅에 있었다건만 저는 이날 이때까지 모르고 있었으니 참괴의 정을 금할 수 없는 동시에, 이 전기가 출판된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교신 일기(1940. 2. 13. 성서조선)

최양 소전의 제삼판 인쇄를 부탁하다. (김교신일기, 1940.2.13)

김교신 일기(1940. 3. 4. 성서조선)

최양 소전(小傳) 125책을 철도편으로 원산 루씨고녀로 발송하다. 최양의 모교에서 제2, 제3의 최양이 나기를 잔뜩 기대하면서.

샘골강습소

최용신이 샘골강습소에 대한 여러 차례 탄압에도 이를 끝까지 운영한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곧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민족운동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동생 용경은 그녀 유훈을 받들고자 샘골학원 교사로서 자원을 마다하지 않았다.

샘골강습소 낙성식 기념 (1933년)

일제는 그녀 사후 샘골학원을 폐쇄시키기 위한 여러 방안을 강구하였다. 주민들은 응집된 결집력으로 이를 저지할 수 있었다. 최용신에 대한 추모와 절대적인 신임은 물질적인 빈곤 속에서 결코 굴절하거나 비굴하지 않았다.

불우한 청소년을 위한 샘골고등농민학원(샘골웨슬레농민학원)의 유지도 이와 같은 역사적인 연원에서 가능할 수 있었다.

최용신양을 기리는 글(류달영, 1974. 11. 30.)

일제하 처절하던 민족 수난기에
나라의 광복 위해 모든 것 버리고 농촌계몽의 선구로 불사조 되어
이 고장 이 마을에 생명을 바쳤네. 영원히 역사에 푸르른 얼이여
꽃다운 처녀 싱그러운 상록수여 민중의 가슴 속에 뿌리 깊이 잡아
지금도 쉬지 않고 사랑으로 자라네
(류달영, 1974, 11.30)

최용신의 한국YWCA 농촌지도사로서 샘골 지원은 스스로 가치관을 실천하는 현장이었다. 주민들의 냉담한 반응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묵묵하게 수행하였다. 겸손ㆍ겸양과 헌신적인 노력은 점차 주민들에게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샘골강습소 신축과 확장은 단순한 ‘학습장’이 아니라 여론을 수렴하는 활동공간이자 생생한 삶의 현장이었다. 상호간 신뢰와 믿음은 주민 각자에게 자신감을 부여하는 등 미래지향적인 삶을 일깨웠다. 부녀회ㆍ청년회의 저축계 운영은 이를 반증한다.

그녀는 생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샘골의 영원한 친구이자 동반자였다. 학생들에게는 다정다감한 참다운 스승으로, 주민들에게는 어떠한 고난에도 좌절하지 않는 영원한 ‘불사조’로서 기억되었다.

26세라는 육신의 짧은 인생에 비하여 그녀는 우리 귀감으로서 다가온다. 숭고한 생애는 메마르고 이기적인 오늘날 세상을 밝히는 한줄기 광명이나 다름없다. 일제강점기 질곡의 와중에서 보여준 헌신적인 생애는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숭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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